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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도시는 몇 번씩 가면서, 충남 공주는 왜 한 번도 안 갔을까요? 저도 이번에 처음 가보고서야 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인스타 알고리즘에 국내 소도시 영상이 자꾸 뜨길래 반신반의하며 떠난 여행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예상을 꽤 크게 빗나갔습니다. 좋은 쪽으로요.

세계유산이 걸어서 닿는 곳에 있다는 것
뚜벅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단연 접근성입니다. 관광 명소들이 얼마나 도보 동선으로 묶이는지, 대중교통 환승 없이 이동 가능한 반경이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따지게 됩니다. 공주가 특히 눈에 들어왔던 이유도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작고, 핵심 명소들이 금강과 제민천을 축으로 촘촘하게 모여 있는 구조입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공산성부터 무령왕릉, 제민천 거리까지 도보 동선이 실제로 연결됩니다.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여기서 세계유산이란, 유네스코가 인류 공통의 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한 문화재 및 자연유산을 의미합니다. 2015년 공주의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포함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일괄 등재되었습니다(출처: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아침 일찍 도착했을 때 공산성 입구에서 느낀 첫인상은 솔직히 말하면 '어, 이게 다야?'였습니다. 그런데 성곽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규모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피톤치드(phytoncide) 향이 가득한 숲길이 펼쳐지는데, 피톤치드란 나무가 해충이나 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출하는 휘발성 물질로, 스트레스 호르몬 감소와 면역 기능 향상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성분입니다. 서울에서 한참 못 맡았던 냄새라 그런지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바로 깨더군요. 다람쥐와 잠깐 눈도 맞추고, 성곽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그 뷰가 생각보다 훨씬 멋있었습니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의 능으로, 삼국시대 고분 중 유일하게 피장자(被葬者)가 확인된 유적입니다. 피장자란 무덤에 묻힌 인물을 뜻하는 말인데, 대부분의 고분은 발굴해도 주인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는 반면 무령왕릉은 묘지석이 함께 발견되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사례입니다. 솔직히 역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이건 좀 신기하다 싶었습니다.
공주 뚜벅이 여행을 계획한다면 아래 동선을 기준으로 잡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 공산성 (성곽길 도보 약 1시간, 세계유산)
- 무령왕릉 및 국립공주박물관 (도보 이동 가능, 약 1~1.5시간)
- 들기름 메밀국수 점심 (100% 메밀가루 사용 로컬 맛집)
- 공공자전거 백제씽공주 대여 후 제민천 거리 이동
- 제민천 카페·소품숍·서점 투어
- 광장순대 시장 골목
제민천이 바꿔놓은 도시의 온도
제민천은 공주 구도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소하천입니다. 과거에는 악취가 나는 도시 하천이었다고 하는데, 대규모 생태 하천 복원사업을 거쳐 지금은 공주 감성 여행의 핵심 축으로 완전히 탈바꿈했습니다. 하천 복원사업이란 콘크리트로 덮이거나 오염된 도시 하천의 자연성을 되살리고, 주변 보행 공간과 문화 시설을 함께 조성하는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 프로젝트를 말합니다. 도시재생이란 쇠퇴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물리적·사회적 환경을 종합적으로 개선하는 사업 방식입니다.
제가 제민천에 도착했을 때 비가 살짝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오히려 분위기를 더 올려줬습니다. 카페 처마 밑에 앉아 빗소리 들으며 홍차에 스콘 먹는데 한 시간이 그냥 흘러가더군요. 그 카페에서 우연히 나태주 시인님을 멀리서 뵙는 행운도 있었습니다. 공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시인이 실제로 그 도시의 카페에 앉아 계신 장면이, 제민천 거리가 단순한 감성 상권이 아니라 실제 예술가들의 생활 공간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공주 여행에서 가장 의외였던 점은 '독서의 도시'라는 분위기였습니다.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 카페와 서점 어디서나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저처럼 혼자 온 남성 여행자가 거의 없고 혼자 온 여성 여행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시끄럽지 않고, 쫓기는 느낌도 없고, 카페마다 독립서점처럼 큐레이션된 책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국내 도시 중에서 이런 '사색 여행'의 결이 이만큼 뚜렷한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보완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도 있었습니다. 공공자전거 백제씽공주의 인프라는 훌륭했지만, 제민천과 무령왕릉 구간을 잇는 자전거 동선이 직관적이지 않아 몇 번 헤맸습니다. 버스 배차 간격이 넓은 소도시 특성상 자전거가 사실상 유일한 이동 수단인데, 초행 여행자를 위한 안내 표지가 좀 더 촘촘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시장 골목에서 만난 일부 상인분들의 분위기가 초행 여행자에겐 다소 위축감을 줄 수 있습니다. 광장순대가 제가 먹어본 순대국 중 진짜 손에 꼽을 만큼 맛있었음에도, 그 골목에 선뜻 들어서기까지 망설임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로컬 음식의 완성도와 접근성은 별개의 문제라는 걸 이번에 다시 느꼈습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국내관광 활성화 정책).
공주시의 관광 경쟁력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콘텐츠에 있습니다. 세계유산, 생태 하천, 독립서점, 로컬 음식이 한 도시 안에 이렇게 밀도 있게 모여 있는 곳은 국내에서 드뭅니다. 이 콘텐츠를 외지인에게 더 친절하게 안내하는 스토리텔링과 수용태세가 갖춰진다면, 한 번 오고 가는 관광지가 아닌 다시 찾고 싶은 소도시가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일본 소도시만 찾던 저도 이번 공주 여행 이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다음엔 가을에 다시 와서 공산성 노을을 보고, 이번에 시간이 없어 못 산 알밤 모찌도 어머니 선물로 챙겨 올 생각입니다. 국내 소도시 여행을 아직 안 해보셨다면, 첫 번째 목적지로 공주를 진지하게 고려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