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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살면서 지하철역 2분 거리에 조선시대 성벽을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날씨가 선선하게 풀리던 날, 무작정 동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다산 성곽길을 걸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한양도성 순성길, 알려진 것과 실제는 달랐습니다
흔히 서울 성곽 트레킹 하면 낙산 성곽길만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산 성곽길은 낙산과는 결이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낙산이 탁 트인 조망 중심이라면, 다산은 오래된 마을과 성벽이 바짝 붙어 있어 골목 안쪽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강합니다.
여기서 순성길이란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안팎으로 걷는 도보 코스를 의미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관리를 위해 성벽을 한 바퀴 도는 '순성(巡城)' 관행이 있었는데, 현재는 이를 복원해 시민 트레킹 코스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150m 남짓 걸으면 성곽 입구가 나옵니다. 이 구간은 한양도성 18.6km 전체 구간 중 남산 구간에 해당합니다. 한양도성은 방어 목적이 아닌 도성의 경계선을 긋는 용도로 쌓았다는 점이 일반적인 성곽과 다른데, 성벽 곳곳에서 각자성석(刻字城石)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각자성석이란 성을 쌓은 지역과 담당자 이름을 새긴 돌을 의미하는데, 일종의 품질 책임제였던 셈입니다. 제가 직접 성벽을 짚어보며 새겨진 글자를 확인했을 때 꽤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놀랐습니다.
다산 성곽길은 외부 성곽길과 내부 순성길 두 갈래로 걸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곽 안쪽이 더 잘 정비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외벽 쪽이 오히려 더 다채로웠습니다. 예술 감성이 담긴 벽화와 감성 카페들이 외부 성곽길을 따라 자리 잡고 있어서 걷는 발걸음이 자꾸 느려졌습니다.
카페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입구에 걸린 풍경 소리에 발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통창 너머로 성곽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갓 구운 빵과 커피를 마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드라마 닥터 슬럼프에서 박신혜 배우의 집으로 나온 촬영지더라고요. 분위기가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좋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편, 내부 순성길 일부 구간은 지붕 없이 시멘트만 발라진 채 방치된 성벽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만큼, 이런 구간은 역사적 가치에 걸맞은 정밀 보수가 필요해 보입니다. 서울시는 현재 한양도성 정비 및 관리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출처: 서울특별시 한양도성).
이 구간에서 꼭 들러볼 만한 곳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산동 무궁화 꽃길: 성곽 외벽 초입에서 만나는 꽃길로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줍니다.
- 다산성곽도서관: 2021년 개관한 한옥 리모델링 공간으로, 계단형 옥외 독서 쉼터가 이색적입니다.
- 성곽 마루 팔각정: 능선 위에 자리해 남산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쉼터입니다.
북측 순환로, 소문보다 훨씬 걷기 좋았습니다
다산 성곽길에서 국립극장을 지나면 남산 북측 순환로로 이어집니다. 북측 순환로란 남산 북쪽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왕복 차량 통행 없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 총 3km 남짓 됩니다. 쉽게 말해 남산 허리를 둘러 걷는 숲속 산책로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산 하면 N서울타워 케이블카나 계단 오르기를 먼저 떠올리는데, 저는 북측 순환로가 훨씬 질이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나무 밀집 구간인 소나무 힐링길은 피톤치드(phytoncide) 농도가 높기로 알려진 구간입니다. 피톤치드란 수목이 병균·해충·곰팡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방출하는 항균 물질로, 인체에 스트레스 완화와 면역력 강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봤는데, 오전 시간대에는 도심과 완전히 차단된 것 같은 고요함이 있었습니다.
2024년 7월에 새로 개통된 북측 숲길도 주목할 만합니다. 기존에 명동 방향에서 N서울타워까지 약 1시간이 걸렸는데, 북측 숲길을 이용하면 20분으로 단축됩니다. 단, 제가 걸었던 날에는 데크 페인트 공사로 통제 중이었습니다. 유지보수 공사 일정이 사전 고지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있어서 방문 전에 서울의 산 공식 채널에서 통제 여부를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북측 순환로 중간에는 석호정이 있습니다. 석호정이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활터로, 현재도 전통 궁술(弓術) 체험과 교육을 운영하는 시민 공간입니다. 성곽길과 활터가 같은 동선에 있다는 것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독특한 층위를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순환로 끝 지점 전망대에서는 인왕산과 북한산이 도심 빌딩군 뒤로 겹쳐 보이는 시티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전망대는 남산 북사면에서 북서쪽 방향을 조망하는 지점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는 능선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서울시 공원 이용 현황에 따르면 남산공원의 연간 탐방객 수는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출처: 서울특별시 공원녹지).
전망대 구경 후 순환로 끝자락에 모여 있는 남산 왕돈가스 거리에서 파전과 비빔밥, 돈가스로 배를 채웠습니다. 제가 직접 먹어봤는데, 트레킹 후 허기진 상태라서 그런지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뭐든 걷고 나서 먹으면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재미로 골목을 따라 지하철역으로 내려왔습니다. 원색으로 채워진 골목이 외국인 관광객에게 꽤 유명한 곳이었는데, 저는 이게 오히려 이 동네의 정체성 혼재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고즈넉한 성곽과 드라마 촬영지 카페와 외국인으로 북적이는 포토존이 500m 안에 다 모여 있으니, 취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여행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산 성곽길에서 남산 북측 순환로까지 총 8km, 휴식 포함 약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주말 이른 오전에 출발하면 카페도 여유롭게 들릴 수 있고, 전망대에서의 조망도 훨씬 선명합니다. 북측 숲길 통제 여부만 미리 확인하고 나서면, 이만큼 밀도 있는 서울 도보 코스는 흔치 않습니다. 한 번 걸으면 자주 오고 싶어지는 길이라는 게 과장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