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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묵호가 이렇게 좋은 동네인지 몰랐습니다. 처음엔 강릉 가는 길에 그냥 한 번 내려보자는 마음이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동해시의 작은 항구 마을 묵호. KTX 한 번으로 닿는 이 동네가 요즘 뚜벅이 여행자들과 MZ 세대 사이에서 가장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이유를 직접 겪어보니 이제는 완전히 이해가 됩니다.

논골담길, 골목이 들려주는 사람 냄새
묵호역에서 짐을 내려놓자마자 제일 먼저 향한 곳이 논골담길이었습니다. 과거 묵호항에서 생계를 잇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언덕배기 주거지로, 집과 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좁은 골목들이 사방으로 이어진 곳입니다. 솔직히 처음엔 '벽화 골목이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걷기 시작하니 달랐습니다.
여기 벽화들은 인스타그램 감성으로 예쁘게 채운 그림이 아닙니다. 고기잡이배를 기다리던 여인, 언덕을 오르내리며 생선을 이고 팔던 아낙, 비바람 속에서도 하루를 버텨낸 어부들의 이야기가 골목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게 이 길을 걷는 내내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이른바 장소성(Sense of Place)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쉽게 말해 그 공간만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와 기억이 물리적 환경에 녹아든 상태를 뜻합니다. 논골담길에는 그 장소성이 살아 있었습니다.
골목 중간에 자리 잡은 '랩 103'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주는 공간이라는 소개 문구부터가 마음에 걸렸는데, 제가 직접 창가에 앉아보니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그냥 책장 몇 장 넘기다 동해 바다 쪽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카페 나폴리'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곳인데, 구석구석 쌓인 손때 묻은 소품들을 보다가 이 공간의 주인은 기억을 수집하는 사람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논골담길을 찾는 여행자들의 구성이 이 동네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 혼자 노트에 무언가를 꾹꾹 눌러 적는 여행자
- 작은 카페 구석에서 책을 읽으며 오후를 통째로 보내는 여행자
- 지도 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가게 하나씩 들여다보는 여행자
번잡한 관광지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들입니다. 묵호가 조용한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짜릿함과 아슬함 사이
논골담길 언덕을 다 오르면 묵호등대가 나옵니다. 항구 마을이었던 만큼 배의 항로를 안내하는 데 쓰였던 시설인데, 지금은 GPS 항법 시스템이 그 역할을 대부분 대체했지만 여전히 이 동네의 든든한 랜드마크로 서 있습니다. 등대 탑에 올라서면 동해바다가 수평선까지 탁 트이는데, 그 시원함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바로 곁에 도째비골 스카이밸리가 있습니다. 절벽 위에 설치된 스카이워크(Skywalk)입니다. 스카이워크란 강화 유리나 금속 그레이팅으로 바닥을 만들어 절벽이나 협곡 위에 설치한 전망 데크 구조물을 말합니다. 발아래로 바다와 해안 절벽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높이에 대한 공포감을 그대로 체험하는 구조입니다.
저는 이런 구조물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있습니다.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정적인 매력이 중심인 묵호의 분위기와 어울리는가 하는 질문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올라가보니 교각을 최소화하고 바다 방향으로만 시야를 열어둔 구조 덕분에 경관 훼손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관광객이 수용 한계를 초과해 몰리면서 주민 생활과 자연환경이 훼손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도째비골 스카이밸리가 묵호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 오버투어리즘 문제는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카이밸리 아래 해랑전망대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도깨비 방망이 형태로 바다 쪽으로 85미터 뻗어 있는 구조물인데, 제 경험상 이곳은 먼 경치보다 발아래 가까이서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재미가 훨씬 컸습니다. 어달삼거리의 바다 뷰는 정말 영화 세트장 같았고, 하평 해변에서는 기차와 바다를 같은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는 이유로 철길 위에서 사진을 찍는 분들을 봤는데 솔직히 이건 위험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입니다. 지자체의 명확한 안전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원도심 산책,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있는 골목
도째비골에서 내려와 묵호역 주변 원도심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구역이 사실 묵호 여행의 진짜 핵심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동쪽바다 중앙시장에서 홍합 칼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웠는데, 유명 맛집은 평일에도 웨이팅이 길었습니다. 저는 줄이 적당히 서있는 집을 골라 들어갔고,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어느 집을 들어가도 기본 이상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게 이 시장의 저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장 건너편에 자리한 카라멜 스테이션은 오래된 여관 건물을 리노베이션(Renovation)한 공간입니다. 리노베이션이란 기존 건물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내외부를 현대적 용도와 감각에 맞게 재정비하는 건축 방식입니다. 단순 인테리어 리모델링과 달리 공간의 역사적 맥락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카라멜 스테이션이 묵호를 단순한 항구 마을이 아닌, 취향 있는 여행지로 소비하게 만든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연필 뮤지엄은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감동을 준 장소였습니다. 전 세계의 연필을 수집한 사립 미술관인데, 단순히 희귀 수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생각하고 기록하는 도구로서 연필의 의미를 탐구하는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훈 작가의 원고를 연필로 눌러쓴 흔적이 담긴 전시물을 마주쳤을 때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 오래 머물게 될 곳입니다.
제주, 강릉, 속초 같은 대형 관광지들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으로 홍역을 치르는 동안 묵호는 상대적으로 바가지요금과 프랜차이즈 잠식에서 자유로운 편이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낙후 지역에 외부 자본과 인구가 유입되면서 기존 원주민이 높은 임대료 등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역에서 밀려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국내 주요 관광지의 임대료 상승과 원주민 이탈 실태는 이미 여러 차례 학술적으로 분석되었습니다(출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묵호가 지금의 매력을 오래 유지하려면 이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미리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묵호를 찾는 여행객 수는 KTX 동해 연장 개통 이후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지자체 차원의 관광 인프라 정비가 병행되고 있습니다(출처: 동해시청).
묵호는 아직 잔잔합니다. 커다란 랜드마크를 쫓기보다 느린 걸음으로 골목 하나하나를 걷는 것, 줄 서지 않아도 되는 작은 가게에서 주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 창밖으로 바다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묵호가 제안하는 여행의 방식은 그런 것들입니다. 반짝 뜨고 지는 여행지가 되지 않으려면 주민의 삶과 여행자의 취향이 함께 숨 쉬는 구조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묵호는 분명히 그 균형을 잘 잡고 있는 동네입니다. 조용한 여행이 필요한 분이라면, 한번 훌쩍 떠나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