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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을 떠난 지 20년이 넘은 사람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시장 수제비 한 그릇 때문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저는 실제로 그랬습니다. 어느 봄날 오후, 아무 예고도 없이 울산 동구 명덕시장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결국 짐을 싸서 고향으로 향했고, 그 여정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 어린 시절 저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명덕시장: 결핍의 공간이 위로의 공간이 되다

    고향 음식의 힘을 두고 "단순히 미각 기억일 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것이 훨씬 복잡한 감각 기억(sensory memory)의 작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감각 기억이란 시각, 후각, 미각 등 여러 감각이 특정 시공간과 함께 뇌에 저장되는 기억 방식을 말합니다. 명덕시장 수제비 국물 냄새를 맡는 순간, 저는 그냥 수제비를 먹는 게 아니라 초등학생 시절 엄마 손을 잡고 그 골목을 걸었던 오후 전체를 통째로 다시 경험하는 셈이었습니다.

    50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수제비 가게 앞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시장 풍경이 이렇게까지 그대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들여다보기만 했던 그 가게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한 그릇을 받아들고 쌈장에 찍어 먹는 순간, 참았던 감정이 쏟아졌습니다. 맛이 달라졌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텐데,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직접 먹어보니 알겠더군요. 수제비를 그렇게 좋아하게 된 이유가 단순히 음식 자체가 아니라,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순간 자체, 즉 엄마가 손 잡고 와야만 맛볼 수 있었던 특별함에 있었다는 걸요. 결핍이 오히려 그 기억을 더 또렷하게 만든 것입니다.

    명덕시장에서 확인한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50년 이상 운영 중인 수제비 가게가 여전히 원형에 가까운 맛과 분위기를 유지
    • 시장 골목의 공간 구조와 가게 배치가 2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
    • 어릴 때 자주 오가던 시장 특유의 쌈장 향과 국물 냄새가 감각 기억을 즉각 자극

    동산시장과 울기등대: 지겨웠던 것들이 보물이 되는 과정

    "어릴 때 살았던 동네는 별로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말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릴 때는 정말 지겨웠습니다. 울기등대는 소풍 장소로 너무 자주 가서 이름만 들어도 한숨이 나왔고, 동산시장은 그냥 지나치는 골목이었습니다. 그 지겨움이 세월을 지나 얼마나 소중한 장면들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동산시장에서 40년 넘게 떡볶이를 팔아온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100원에 네 개"라고 하자 사장님이 바로 알아듣더군요. 그 작고 투박한 떡볶이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이걸 맛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맛있다"는 표현은 식품의 관능 평가(sensory evaluation) 기준으로 설명하는데, 여기서 관능 평가란 맛, 향, 식감, 색 등을 오감으로 종합 판단하는 평가 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느낀 건 관능 평가로는 잡히지 않는 무언가였습니다. 맛이 트리거가 되어 감정이 먼저 반응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콩잎 젓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장 한쪽 구석에서 눈이 확 뜨이는 걸 느꼈는데, 콩잎 특유의 짭조름하고 구수한 향이 또 다른 기억을 불러왔습니다. 젓갈 발효 식품의 경우 유산균 발효(lactic acid fermentation)를 통해 깊은 감칠맛이 만들어지는데, 여기서 유산균 발효란 미생물이 당을 분해하여 유산을 생성하면서 식재료를 숙성시키는 과정을 말합니다. 오래된 시장 젓갈 가게가 수십 년을 버티는 이유가 바로 이 발효의 깊이에 있습니다.

    울기등대 바다에서는 그냥 발을 담갔습니다. 어릴 때 "왜 여기를 또 오냐"고 투정 부리던 그 자리에서, 이제는 파도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습니다.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관광객의 고향 방문 목적 중 '향수 및 정서적 회복'이 주요 동기로 꼽히고 있으며, 이러한 회귀형 여행은 정신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출처: 한국관광공사).

    기억의 대물림: 내 아이는 무엇을 기억하게 될까

    이번 여행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질문은 음식 맛도, 풍경도 아니었습니다. "내 아이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까"였습니다. 엄마 손 잡고 시장 골목을 걷는 이 장면이, 20년 뒤 아이에게 어떤 감각 기억으로 남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관점에서 보면,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 함께한 소소한 일상 경험들이 정서 발달의 핵심 토대가 됩니다. 여기서 애착 이론이란 아동이 주 양육자와 형성하는 정서적 유대가 이후 사회적 관계와 자아 형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발달심리학 이론을 말합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에 따르면 "엄마 손 잡고 시장 가기" 같은 반복적이고 소소한 경험이 "어디 특별한 곳 여행하기"보다 훨씬 강한 안정감의 기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저는 명덕시장 수제비를 먹으면서 그걸 확인했습니다. 제가 가장 행복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테마파크도 해외여행도 아니었습니다. 엄마와 손잡고 시장 골목을 걸으며 수제비 한 그릇을 먹었던 그 평범한 오후였습니다. 그렇다면 제 아이에게 지금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도,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이런 소소한 동행일지 모릅니다.

    물론 "특별한 경험을 많이 만들어줘야 아이에게 좋은 기억이 남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일부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 고향 여행을 통해 직접 확인한 건, 기억의 온도는 이벤트의 크기보다 함께한 사람의 온기에서 결정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시장 냄새와 닳은 아스팔트, 그리고 수제비 국물이 그 어떤 화려한 장면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하나의 답처럼 느껴졌습니다.

    고향을 다시 찾는 일이 "단순한 감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서적 재충전(emotional recharging)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20년 넘게 쌓인 그리움을 풀어낸 하루였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건 그 여행이 앞으로의 일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놓았다는 점입니다. 울산 동구 명덕시장이 어린 시절 저를 키운 공간이었다면, 지금 아이와 걷는 이 골목들은 아이를 키우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고향에 가본 지 오래됐다면, 계절이 바뀌기 전에 한번 다녀오시길 권합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zZAi_KIudmI